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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권-“라떼는 말이야"가 필요할 때-20211117 울산신문


▲ 이동권 북구청장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그 문화는 단절 위기에 놓였다. 이런 가운데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농소2동 냉천마을 반동댁. 냉천마을향리수호회 소통추진위원회가 김매기소리와 보리타작 노래를 들려줬다. 그곳에서 나는 순식간에 어린시절의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중학교 1학년이던 나는 당시 흔치 않던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먼 친척 할아버지의 발이 돼 주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지금의 농소1동 행정복지센터 근처에서 큰 한의원을 운영하셨다. 우리 동네는 물론이고 농소 지역에서는 꽤나 유명세를 탔었는지 한의원은 늘 문전성시였다. 큰 한의원을 운영했으니 동네에서는 손에 꼽히는 부잣집이었다.

 

나는 아침 등굣길에 손수레를 이용해 2km 남짓 거리에 위치한 한의원으로 할아버지를 모셔다드렸고, 하굣길에 다시 댁으로 동행하며 한의원 출퇴근을 도왔다. 한의원을 은근하게 감싸는 달달한 감초 냄새가 정말 좋았다.

 

할아버지를 모셔다드리며 나는 제법 많은 용돈을 받았다. 어린시절 집안 사정이 좋지는 않았으니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평소 모친이 했던 말 때문에 더욱 그 일에 애정을 쏟았던 것 같다. 

 

어머니는 “니가 다섯 살 때 갑자기 다리에 경련이 오고 소아마비 증상도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침을 놓아 치료하셨다"고 말하곤 하셨다.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툇마루에 앉아 나를 기다리셨다. 엄격하고 진지한 할아버지의 표정이 기억에 선하다. 나는 손수레 가운데 큰 방석을 깔고 안전하게 할아버지를 모셔다드리는 운전수가 됐다. 

 


조심조심 운전을 했지만 비포장도로에서 손수레가 덜컹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때마다 할아버지는 “이놈의 손이 조심하지 않고"라며 낮은 목소리로 나를 나무랐다. 

 

할아버지가 무서울 법도 했을 텐데 나는 할아버지의 운전수 노릇을 1년이나 넘게 했다. 돈도 돈이었지만 고깃국에 맛있는 반찬까지 먹을 수 있는 날이 여럿이었다. 할아버지 댁 아들 내외는 내게 푸짐한 밥상을 내어 주는 날이 많았다. 제사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면 나는 배부른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엄격하시던 한의원 할아버지도, 그 아들인 먼 친척 아재도 이제는 돌아가셔서 뵐 수는 없다. 구청장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푸짐한 밥상을 내어 주셨던 할아버지의 며느리인 먼 친척 아지매와 연락이 닿았다. 시골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도회풍의 신식 여성, 어린 시절 내 눈에는 천사 같았던 그는 여든이 훌쩍 넘었고 나를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손수레 이야기를 들으시곤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50년도 더 지난 어린시절 내 기억 속 그 집은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대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다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이 하나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무도 살지 않는다지만 근엄했던 할아버지와 먼 친척 아재, 아지매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도시개발과 함께 동네 사람들은 재작년 동네에서 가장 크고 상징성 있던 엉게나무를 반동댁 근처에 옮겨 심었지만 아쉽게도 시들어 죽고 말았다. 

 

이렇게 과거의 추억과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냉천마을향리수호회 소통추진위원회는 보리떡과 농주를 만들고, 옛 방식으로 짚을 이용해 바구니도 만드는 등 마을 전통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런 전통과 문화자원을 상품화해 사회적경제 기업으로 확장해 간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했다.

 


또 최근 우리 구에서는 8개 동 토박이 어르신들의 기억과 추억 속 이야기를 모은 북구 스토리텔링 책자를 제작했다. 동네마다, 마을마다 어르신들이 기억하는 옛이야기는 지금이 아니면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이 책은 더욱 의미가 있다. 

 


이런 노력들은 새로 유입되는 주민들에게는 지역의 역사를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고, 나 같은 토박이들에게는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라떼는 말이야"가 소중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이 글을 쓰는 오늘 밤 꿈에서는 냉천마을과 북구 동네 곳곳 산과 들을 뛰어다니던 14살의 나를 만날 것 같다.